‘약탈(掠奪)’은 ‘폭력을 써서 남의 것을 억지로 빼앗음’이란 뜻이다. 하지만 폭력을 ‘권력의 부당한 행사’까지 포함하는 넓은 개념으로 본다면 이른바 ‘지대추구(rent-seeking)’도 약탈로 볼 수 있다. 지대추구는 개인이나 집단이 생산적 활동을 통해 수익을 얻기보다 국가 부문의 자원과 영향력에 접근하여 수익을 얻고자 하는 비생산적인 행위를 의미한다. 정치와 행정을 ‘사익을 추구하는 비즈니스’로 보는 공공 선택 이론의 관점에서 보자면, 지대추구는 그 비즈니스에 “나도 좀 먹자”숟가락을 들이대는 행위인 셈이다. 결국 정치인과 관료는 자기들의 잇속을 채우기 위해 정치와 행정을 한다. 그들은 사익을 추구하는 이익집단일 뿐이다.
사실 약탈은 우리의 일상적 삶의 도처에 흘러넘친다. 우리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약탈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여 년 전 서강대학교 사학과 교수 임상우가 지적한 ‘끼리끼리 뜯어먹자판’은 여전히 유효할 뿐만 아니라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다. 정치인뿐만 아니라, 지식인, 언론, 전문가 집단 모두 ‘끼리끼리 뜯어먹자판’의 공범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아울러 크고 작은 사회 문제의 진단과 토론에 동원되는 전문가 집단도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진보는 좀 다르지 않을까? 그것도 헛된 기대다. 여성학자 정희진은 “내 주변에는 대체로 진보 진영이나 여성주의자가 많다. 흔히 도덕적일 것이라고 기대 받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최근 몇 년간 내 경험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폐쇄성이 겹쳐서 그런지, 이 ‘판’도 만만치 않다. 규모가 작을 뿐 ‘우리 안의 최순실, 트럼프’가 한 둘이 아니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폭력은 기본이고, 사기, 표절, 계급주의, 학벌주의, 소비주의, 연줄 문화, 약자에 대한 모욕과 막말, 이중성……. 나는 겪었고 보았다. 진보 혹은 페미니스트라고 자처라는 이들이 사익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한다는 것을. 이제 인간의 ‘본질’이 호모사피엔스(생각하는 사람)냐, 호모파베르(도구를 만드는 인간)냐, 호모루데스(놀이하는 인간)냐를 논할 시기는 지난 듯하다. ‘호모쉐임리스(뻔뻔한 인간)’의 시대다.”
그렇다. 우리는 그런 ‘호모쉐임리스(뻔뻔한 인간)’의 시대에 살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게 세상을 바꾸려는 사람들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반대편 탓만 하다 보면, 개혁은 밥그릇 싸움으로 전락하고 만다. 약탈 정치는 좌우나 진보-보수의 문제가 아니라, 지난 반세기 넘는 세월 동안 누적되어온 우리의 경제 발전 방식과 그것에 의해 형성된 삶의 방식에 녹아 있다는 게 우리의 기본 시각이다.
박근혜 탄핵으로 인해 '9년의 기록’이겠지만, 햇수로 10년이요 이후에도 한동안 계속 짙게 어른거릴 박근계의 그림자까지 염두에 둬 '9년의 기록’이라고 했다. 그 기록의 의미는 망각과 냄비근성을 넘어서 과거를 교훈의 텃밭으로 삼는 데에 있다. 망각과 냄비근성은 우리 근현대사의 수많은 갈등과 상처, 삶의 고난과 시련을 넘어서게 만드는 데에 적잖은 기여를 하기는 했지만, 우리에게 과거를 통한 배움의 기회를 박탈하는 심각한 문제점을 낳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정치와 사회에 대해 잘 모르지만 이명박에서 박근혜로 이어지는 한심한 정치를 보고 정리하여 본 기술경영 전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