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자는 공자가 창시한 유학을 현실적이고 객관적 입장에서 체계화하고 이론적으로 재정립한 전국 시대 최고의 사상가이자 성악설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인간 본성에 관한 순자의 견해는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선하다는 맹자의 낙관적인 견해와 근본적으로 대조를 이룬다.
순자의 이름은 황(況)으로, 순경(筍卿) 혹은 손경(孫卿)이라 불리기도 하며 전국 시대 후기 조나라 유학자였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에는 순자에 관해 이런 기록이 남아 있다. “순경, 조나라 사람. 나이 오십 무렵에 처음으로 제나라에 와서 공부를 했다. 제 양왕(襄王) 시기에 가장 권위 있는 스승으로 추대받았다. 제의 상수(商脩)에게 사사했으며 대부의 자리가 비어 이를 담당하며 세 차례에 걸쳐 제주(祭酒, 연회 시에 신에게 술을 따라 바치는 가장 존경받는 연장자)의 직을 맡았다.”
제나라 사람이 순경을 참언으로 모함하자 이를 피해 초나라에 갔으며 춘신군(春申君)에 의해 난릉령(蘭陵令)에 임명된다. 진시황의 승상으로서 군현제 실시, 문자 ‧ 도량형의 통일 등 통일 제국의 확립에 공헌했던 이사(李斯)는 그의 제자였다. 순경은 세속적이고 혼탁한 정치를 혐오했다. 당시 망해가는 나라에는 혼군이 짝을 이루며, 사람들은 큰 도를 따르지 않고 무속 신앙을 행하며 구복술을 믿었다. 또한 눈곱만 한 이익에 집착하는 비루한 유학자 혹은 장자의 무리처럼 황당무계한 말로 세상을 어지럽히는 이들이 넘쳐났다. 그리하여 순자는 유가, 묵가, 도가의 장점과 단점을 종합해 수만 자에 달하는 저작들을 차례로 남기고 세상을 떴다.
순자는 오랫동안 직하(稷下)에서 강의를 했다. 당시 직하는 백가쟁명의 중심지로서 각 유파는 그곳에서 저서를 집필하고 학설을 세우며 이론을 전파했다. 각 유파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던 순자는 백가의 장점을 모두 아우르는 특징을 보여준다. 그는 각 사상과 유파의 견해를 진지하게 회의했고 변론했으며 비판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공자의 유학을 발전시키고 완성하며 구조화한 사람이 바로 순자라는 점이다.
순자는 인성의 선악, 하늘과 인간의 관계, 왕도와 패도, 그리고 의리 사상, 선왕과 후왕, 시서예의(詩書禮義) 등 모든 면에서 새로운 학설을 전개했으며 맹자의 발자취를 뒤따라가지 않고 오히려 맹자의 잘못된 이론에 맹공을 퍼부었다. 맹자가 공자 유학의 정통 후계자로 일찍부터 학자들로부터 주목을 받은 데 비해 순자가 지은 《순자》는 거의 천 년간 사장되어 있다가 당나라 시대에 양경(楊倞)의 주석서가 처음으로 출현하는 정도다. 특히 송나라와 명나라 시기에 들어서는 순자를 탄압하고 맹자를 숭상하는 기풍이 유례없이 심해졌다. 그 후 청나라 중엽에 이르러서야 순자를 연구하고 주석을 다는 학자들이 급격히 증가하게 된다.
- 순자의 글 속에는 합리주의, 종교에 대한 회의, 사회 속의 인간에 대한 관심, 정치·문화적 감각력, 고대의 전통과 관습에 대한 선호 등으로 가득 차 있다.
- 순자는 유가의 도덕적 이상에 대해 열정적으로 옹호하고 철학적 이념과 역사적 현실 사이의 간극을 줄이는 데 실질적으로 기여하였다.
- 성악설에 입각하여 인간의 후천적 노력을 강조한 순자는 인간을 근원적으로 사회적 동물로 인식하여 교육과 사회제도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 순자는 사회적 분업원리를 통한 엘리트 중심의 군주국가 체제를 옹호하였다.
- 순자는 제자백가의 사상을 현실적인 관점에서 비판하고, 또한 체계적으로 집대성하여 중앙집권적 관료국가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전학성 - 기술과 비지니스 통합 파워 러닝 코치
한국전자통신연구원에서 27년간 IT 융복합 분야 연구개발 및 기술사업화에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현재 유통, 신사업, 마케팅 등의 분야에서 스마트 기술 도입과 관련한 기업컨설팅을 제공하며, 기술과 사업을 합친 액션러닝 분야에 대한 개념을 정립하고 셀프 코칭 개념과 액션러닝을 결합한 프로그램과 코칭북 저작방법을 개발하여 비지니스 관련 다양한 분야에 컨설팅과 코칭북 집필에 전념하고 있습니다.